악인이여 LA행 급행열차를 타라


1.
아무리 사람이 망각의 동물이라지만 정말 매번 후회뿐인 경험을 이제는 한 번이라도 더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말하자면, 5시간 이상 비행기를 타는 여행길을 떠날 때는 정말 잠깐이라도 머리에 떠올랐던 것들은 모두 일단 무조건 짐가방에 쑤셔 넣고 그리고 나서 추가로 더 넣을 것을 생각해내기 위해 몇 시간이고 머리를 쥐어 짜며 고민해야 한다. 하다 못해 '이딴건 정말 쓸모 없고 짐만 되겠지'라든가 '이건 도움이고 뭐고 아예 관계가 없는 물건이잖아'라는 생각을 한 것이 있었다면 바로 그것이 이번 지옥의 비행에서 당신을 건져내 줄 구원의 물건이다. 예를 들면 바윗덩어리같은 목 뒤 근육을 한손으로 무주르며 지금 내가 글을 적고 있는 이 종이만 해도, 결국에는 쓸모 없겠지만 무게도 얼마 안 나가고 하니 그래도 혹시나 가져가 보자 하여 단 석 장을 집어 가방에 쑤셔 넣은 오래된 이면지다. 앞면에는 '신임 과장 대상 무슨무슨 교육과정'이라고 쓰여 있는데 나는 지금 과장 5년차다. 바로 이런 것이다. 5년 전에 존재조차 생각하지 않은 채 책장에 꽂아 두고 망각으로 보내 버린 파일 속 이면지가 내가 꾸려온 모든 물건들이 하지 못한 일을 하고 있다. 이 탈출구가 없는 것 같은, 은하철도 999보다 긴 여정을 가고 있는 인천발 LA행 비행기 안에서, 전생에 내 옆구리를 쑤셔대지 못해 한이 맺힌 옆자리 할아버지의 팔꿈치에 피폐해질대로 피폐해진 나의 심신을 위로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 아이폰? 꺼지라 그래. 메모 어플로 글을 적다가 잠깐 적당한 단어를 생각하느라 손을 놓고 이전 문장을 다시 읽어 보노라면 어김없이 1%씩 줄어들며 내 신경을 갉아먹는 놈일 뿐에 다름 아니다. 지난 주말에 사서 스무 장 남짓 읽다가 만 참신한 신인 선수 '참호에 갇힌 제1차 세계대전' 책이 이륙하자마자 떠오른 이래 계속 생각이 나지만 그딴거 다 필요도 소용도 없는 거다. 찾아오지도 않는 서울 간 성공한 자식놈보다 지금 내 어깨를 주물러 주는 배재대생이 낫다. 인생의 당연한 이치를 오늘도 이렇게 또 하나씩 깨우쳐 간다.



2.
미국인은 매너가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건 어디까지나 토종에 국한된 것 같다. 내 옆에 있는 미국 여권 소지자 Korean American 할아버지는 버스간에서 자리 내놓으라 행패 부리는 그 할아버지와 다를 것이 없다. 이민가던 그 시절에서 모든 것이 멈춰버린 그들. 의식, 사고방식, 가치관... 매너도 마찬가지이다.



3.
비상구석이건 맨 앞자리이건 맨 뒷자리이건 뭐가 됐든간에 이코노미석은 답이 없다. 아, 하나 있지. 4열 좌석 팔걸이 다 올리고 두 다리 쭉 뻗고 자는 거.



by 랭보 | 2012/05/01 23:19 | 일상 잡념 | 트랙백 | 덧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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