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오키나와 낙도 기행 2
대충 짐을 펼쳐 놓고 게스트하우스에서 스탭으로 일하는 여자애한테 이런저런 설명을 들었다. 까무잡잡한 그 여자애는 파인애플 같은 머리를 하고 있었는데 붙임성이 좋고 싹싹해서 그런지 귀여워 보였다. -_- 게스트하우스에 묵고 있는 애들은 일본인이 대부분이다. 외국인은 거의 없고 한국사람도 보이질 않았다. 아무래도 9월이라 방학도 끝나고 해서 그런가 보다.

샤워를 하고 나오니 배가 고파져서 숙소에서 시간 죽이고 있던 어떤 애한테 근처에 먹을만한 데가 없냐고 물어봤다. 걔한테 추천을 받아 어설프게 그린 약도를 쥐어들고 '미카도[みかど]'라는 근처 식당에 갔다.




전형적인 동네의 조그마한 정식집이었다.
들어가서 카운터에 앉아 둘러보니 아줌마 셋이서 일을 하고 있고 카운터 옆에 어떤 시간이 넘쳐 보이는 아저씨가 아줌마들이랑 농담따먹기를 하고 있었다. 오키나와에 왔으니 오키나와 음식을 먹어야 겠다는 생각을 하고 그 쓴맛으로 유명한 고야챰플 정식을 시켰다.




'고야'라는 건 겉이 울퉁불퉁한 오이과의 채소인데 우리나라 이름으로는 아마 '여주'라고 부르는 걸로 알고 있다. 생김새가 꽤 그로테스크한 놈인데 그걸 저렇게 얇게 썰어서 두부, 계란, 햄과 함께 프라이팬에 볶은 게 고야챰플이다. 맛이 엄청 쓴 걸로 악명이 높지만 비타민C가 많아서 건강에 좋대나. 밥을 고봉으로 담아 준다. 저렇게 해서 650엔.

맛있다. 처음엔 달짝지근하면서 간도 적당하고 씹는 맛도 좋고 해서 '맛만 좋구만'하면서 먹는데 그 뒤로 쓴맛이 은근히 몰려온다. 먹을수록 점점 쓰다. 나중에는 쓴맛이 지배적이 되어 버리는데 원래 몸에 좋다면 쓴거 저런거 별로 신경 안쓰고 잘 먹는 식성이라 다 먹었다. 뭐 꽤 먹을만 했다.



밥을 먹고 오니 주인아저씨랑 스탭 여자애 정도밖에 없다.
스탭 여자애가 주인아저씨한테 북치는 걸 배우고 있다. 게스트하우스 거실은 이렇게 생겼는데 깨끗하고 분위기도 좋다. 재료 사다가 주방에서 요리해 먹어도 되고 그때 쓸 조미료는 다 구비되어 있으며 공짜로 써도 된다.



스탭 여자애 머리가 저런데 귀엽다. 저런 머리는 뭐라고 부르나.
아저씨는 몰랐는데 나중에 보니 상당한 괴짜였다. 내가 애들이랑 일본말로 얘기하는 걸 뻔히 보면서도 꼭 나한테 말할 때 영어로 얘기한다. 자기는 외국인한텐 일본어 안쓴댄다. 영어 쓰는게 좋다나. 잘하는 영어도 아니다. -_-

조금 쉬었다가 다시 나갔다. 국제거리. 그래도 명색이 오키나와에 왔는데 국제거리라도 한 번 가봐야 되지 않겠나 해서 갔다. 1일권이 있으니 숙소앞 역에서 모노레일을 타고 한 정거장 가서 현청앞[県庁前] 역에서 내렸다. 현청앞 역에서 내리면 국제거리의 서쪽 끝으로 들어갈 수 있다. 참고로 동쪽 끝은 마키시[牧志] 역에서 내리면 된다.




국제거리는 진짜 관광지의 거리라는 게 물씬 느껴지는 곳이었다.
길가에 있는 가게들은 전부 선물가게(과자,시사,아와모리,다른먹을거)랑 오키나와 요리 파는 식당, 술집밖에 없었다. 근데 국제거리는 사진으로 본 것과 비교하여 길이 실제로는 좀 좁았다. 왕복 4차로 정도. 이름값에 비해선 그냥 소박한 거리였다. 10일날 돌아갈 때 친스코우 살 가게를 봐 두었다. 사타안다기는 그날 바로 만들어 파는 가게를 찾아가서 살 생각이다.



국제거리의 서쪽 끝에는 '오키나와야' 스크램블지점이 있다. 오키나와야는 이것저것 토산품을 파는 가게로 국제거리 안에만 해도 분점이 여러 군데 있는 꽤 유명한 가게다. 각 분점마다 주력품목이 다른데 스크램블점에는 주로 먹을거와 악세사리 위주이다. 오키나와 특산 요리를 저렇게 즉석식품으로 만들어서 파는 게 많았다. 그리고 오키나와의 대표 과자 친스코우도 많고.

슬슬 걸어가면서 구경하는데 '타코스야'를 도무지 못 찾겠다. 오키나와 명물(?) 타코라이스는 꼭 한번 먹고 가려고 했는데 어찌해야 하나... 오늘밖에 기회가 없을 것 같은데 난감하다. 아직 오키나와 소바도 한번 못 먹었고 젠자이[金時]도 못 먹었다. 젠자이라...... 젠장! -_-

국제거리 중간 쯤에 오락실이 하나 있다. '철권5 - 다크 레저렉션'을 애들이 열심히 하길래 나도 세 판 정도 해 봤는데 한 번도 못 이겼다. -_- 레버가 국내 철권 레버와는 다르게 버추어파이터에 쓰이는 그 사각 레버다. 그리고 애들이 모두 레버를 손바닥이 위로 가게 잡는 일본식(?)그립을 사용하고 있더라. 암튼 오락실에서 간만에 담패 피워 물면서 하니 좋았다. 일본은 이젠 길거리에서 담배 피우는 건 좀 엄해졌지만 가게 같은데선 아직 관대하다. 아, 오락실은 한 판에 50엔이었다. 게다가 철권5도 5판3선승제니까 뭐 그렇게 비싼 것 같지는 않다.



숙소로 돌아올 때는 걸어서 왔다.
국제거리 중간에서 미에바시역 방향으로 나 있는 이 길로 왔는데, 오다보니 전에 인터넷에서 본 여행기에 누가 묵었다던 게스트하우스를 발견하여 사진을 찍어 보았다. 국제거리에서 미에바시 쪽으로 난 길을 걸어 중간쯤 오다 보면 왼편에 있다. '겟꼬소[月光荘]'라는 간판이 보이는데 그곳이다.

졸라 걸어서 구경하고 숙소로 돌아오니 8시반쯤 됐다. 방에 가 보니 내 침대 밑 자리 애가 있는데 시꺼먼게 꽤 멋지게 생긴 놈이었다. 짐 펼쳐 놓은 걸 보니 여기 묵은지 꽤 된 것 같은 포스를 느낄 수 있었다. 여기서 뭐 음식도 해먹고 할 수도 있는데 나도 다음엔 좀 오래 묵으면서 지내 보고 싶은 생각도 든다. 여자애들도 많이들 온다. 우리나라만 국한된 게 아니라 정말 여행가는 애들 중에는 확실히 여자애들이 많다. 우리나라야 군대문제도 있고 해서 여자애들이 훨씬 더 많이 빨빨거리며 해외로 놀러다니고 하는데 우리나라만 그런 건 아닌가 보다.

편의점 가서 오리온 생맥주와 산삥차 등을 사가지고 와 거실에서 맥주를 마시면서 슬슬 쉬었다. 마루에 앉아서 선풍기 바람을 쐬며 맥주를 마시고 있노라니 은근히 시원하고 속편하다. 여기 숙소 분위기가 참 좋다. 애들하고도 좀 더 친해지고 싶은데 아무래도 말이 서툴어서 좀 힘들다. 거의 다 일본애들이고 한국인은 나 혼자고 다른 외국인은 마카오에서 왔다는 애가 한 명 있는데 거의 일본말이 네이티브다. 낮에 체크아웃하는 서양애가 한 커플 있었는데 걔네들은 일본말 그저 그런 수준이지만 양놈답게 립서비스가 장난 아니다. 아무나 보면 무조건 카와이이~~를 남발하며 실실 쪼개니 그거 듣는 애들도 좋아하긴 하더라. -_-

마카오 애가 거실 마루에서 내가 앉은 옆 테이블 맞은 편에 앉아 있었는데, 걔도 슬슬 심심했는지 맥주 마시며 시간 죽이고 있던 나한테 말을 건다. 그래서 좀 얘기하다가 아예 내가 그 테이블로 가서 신나게 노가리를 깠다. 이름을 말해줬는데 까먹었고, 주로 어디서 뭐하고 사는지, 여기는 언제/왜/얼마나 놀러 온건지, 뭐 좋은 구경한 거 없는지 등 여행자들끼리 오가는 평이한 소재의 대화였다. 그래도 꽤 죽이 맞아서 어색하지가 않았다. 신기한 일이다.

그 애는 내일 오키나와 본섬 근처의 게라마 제도 중에서 자마미라는 섬에 간다고 한다. 게라마제도는 나도 이번 여행정보 조사할 때 알아본 적이 있어서 생소하진 않은데, 본섬 근처의 낙도 중에서는 바다가 제일 나은 편이라고 한다. 근데 그냥 가서 스노클링 같은 건 안 하고 해수욕이나 좀 하고 일광욕 하다 온댄다. 거기까지 가서 아깝게시리. 청춘은 뒀다가 어따 쓰려는지... -_-

나는 더 남쪽 바다를 보고 싶어서 비행기 타고 한시간 더 내려갈 거라고 했더니 놀라면서 어딘데 비행기를 또 타고 그만큼 가냐고 오키나와 지도를 가져온다. 지도에 이시가키와 이리오모테가 있긴 있지만, 일본 지도에 오키나와가 왼쪽 위에 따로 칸 쳐져서 있는 것처럼 똑같이 구석에 그런 식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내가 친절하게, 이 지도의 축척으로 실제 지도에 위치를 표시하면 너 뒤에 담벼락 너머 저 바깥이라고 말해줬더니 또 놀랜다. 아무튼 붙임성이 좋은 애였다. 그 스탭 여자애의 붙임성에는 못 따라 가겠지만.

한 30분쯤 얘기하다가 걔가 전화와서 그만 했다. 일본에 유학와서 도쿄에서 학교 다니고 있는 거랜다. 지금은 여행중이라 오사카 찍고 여기로 온 거라고.


마카오 애랑 스탭 애하고 한 장 찍었는데 고장난 카메라라 이렇다. 애들이 다 까맣다. -_-



밖에 흡연 테이블에서 맥주 마시며 담배 피우고 있는데 나타난 놈. 도마뱀붙이의 일종인 것 같다. 쬐끄만게 엄청 빠르더라.

담배 피우고 들어오니 주인아저씨(켄짱이라 부르라고...-_-)가 무슨 마술을 보여 준다고 소파 있는 쪽으로 부르더니 어떤 애 옆에 앉으라고 한다. 여긴 애라고 하면 죄다 여자애다. 아무튼, 카드를 주섬주섬 챙겨 오더니 우리 둘한테 보여 주는데 처음껀 알고보니 어이없는 사기고(좀 있다가 나한테 가르쳐줬다), 2,3번째 마술은 진짜 신기했다. 옆에 앉아 있던 애는 얌전한 성격인지 아까부터 조용히 거기 계속 앉아서 장식용 끈을 만들고 있었는데(재료가 테이블에 있고 100엔을 내면 그걸로 장식용 끈을 만들어 가질 수 있다), 옆에 앉아 있으니 또 이런저런 얘기를 하게 됐다. 근데 둘 다 낯을 가리는 성격이어서 대화가 슬슬 꼬이더니 걔가 바보같은 질문을 하고선 미안하다고 갑자기 그러니 나도 미안하고 순식간에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그래도 이름은 기억난다. 쿠마사키였나 그랬는데 사키는 확실치 않지만 쿠마는 확실하다. 곰이라 하며 웃었더니 쿠마라 부르라고... -_-

방에 들어가서 아래층 침대 애한테 내가 말 걸어서 얘기 좀 했다. 애가 멋지게 생겨서 말 좀 붙여 봤다. 근데 알고 보니 걔는 그냥 놀러 온 게 아니었다. 일단 지금은 여기 게스트하우스에서 장기 투숙을 하면서 일자리를 찾는 중이란다. 스톡 매니저 일을 했었는데 덕분에 미국에도 가서 일하다가 한국애들도 친구로 많이 사귀었다고. 영어도 곧 잘 하고. 애가 생긴 건 아주 비치에서 노는 스타일로 생겼는데(까맣게 타서 머리도 그렇고 옷도 비치 셔츠에...), 의외의 일을 하는 애여서 좀 뜻밖이었다.

근데 도쿄에서 그렇게 일을 하다가 다 때려 치우고 여기로 내려왔단다. 스톡 매니저라는 일이 정말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피를 말리는 일이라고, 자기가 점점 소진되어 버리는 기분이었다고, 다니다가 도저히 이건 아니다 싶어서 이곳에 와서 살면서 일을 찾아 정착할 거란다. 아~~~ 이런... 이상하게도 들으면서 뭔가 부끄러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 용기가 부럽기도 하고 해서 내 얘기도 하고 회사 얘기도 하고 갑자기 얘기가 진지해졌다. 참 이런 곳에서 다른 애들과 웃으며 얘기하던 화제와는 전혀 다른 대화가 잠시 오갔다.

다음날 07:25 출발 이시가키행 비행기를 타려면 졸라 일찍 일어나야 하는데 자꾸 얘기를 하게 된다. 그게 참 이 게스트하우스가 분위기가 아주 잘 잡혀 있어서 애들이 처음 봐도 서로 막 친하게 인사하고 어디 갔다 들어오면 잘다녀왔다고 인사하고 그러고 하여튼 애들도 좋고 가게도 좋다. 솔직히 하룻밤만 묵는다는 게 너무 아쉬운 생각마저 들어서 내일 아침에 못 일어나면 그냥 여기서 3박 하면서 애들이랑 얘기나 하고 놀아야 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스탭 여자애는 이번 9월만 하는 거랬다. 9월에 오키나와 와서 일하면서 겸사겸사 휴가도 보내고.



숙소 옥상에서 바람 쐬면서 찍은 사진. 이때가 마침 음력으로 보름이라 달이 아주 둥글고 컸다.

나가서 잠깐 담배 피우고 있는데 어떤 애가 오더니 같이 피운다. 또 얘기했다. 얘는 스물 다섯 회사원. 파견회사에서 애들 파견 보내는 일을 한다고. 드라마 전차남에서 전차남이 하는 일 같은 건가 보다. 그냥 좀 얘기하다가 잔다고 하고 들어왔다.

이제 정말 자려고 누웠다. 이 게스트하우스의 최대 장점은 밤 10시부터 방에 에어컨을 밤새 풀가동 시켜준다는 것이다. 보통 코인 쿨러 형태로 되어 있어 100엔 집어 놓으면 한 시간씩 나오게 되어 있는 곳이 대부분인데 이건 정말 엄청난 메리트이다. 그리고 역에서 정말 가깝다는 점. 80미터 정도 떨어져 있다. 그런데 갑자기 태클이 걸려왔다. 밤 늦게 들어온 어떤 신참 손님이 30초에 한 번씩 코를 킁킁거리며 아주 지랄을 한다. 저 자식이 또 언제쯤 킁킁댈까를 생각하니 가슴이 벌렁거려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덕분에 간신히 3~4시간 정도 자고 다음 날 4시에 깨서 킁킁대는 소리 들으며 더 자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도저히 안 되겠어서 5시에 그냥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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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랭보 | 2006/09/19 16:50 | 오키나와 여행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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