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름 스캐너 └ 사진


필름 스캐너는 오래 전부터 갖고 싶었던 물건이었다. 3~4년 전쯤이었나 미놀타에서 스캔듀얼IV가 새로 발매된 것을 보고 한 대 있었으면 하고 생각했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후배가 그걸 슬그머니 장만하여 적잖이 부러웠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가격이 꽤 비싸기도 하고 국내에 정식발매를 하지 않은 기종이 많아 선뜻 살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이후, 대부분의 사진을 필름 카메라로 찍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점점 더 필름 스캐너에 대한 열망과 동경의 마음은 커져 갔지만, 꾸욱 참아가며 그저 코스트코의 1500원짜리 필름스캔 서비스로 만족하고 지내는 생활이 계속되었다.

코스트코의 필름스캔은 썩 좋진 않다. 해상도도 1500x1000 정도로 작은 편이고 압축이 꽤 많이 된 jpg파일로 만들어 주기 때문에 후보정을 하는데도 애로가 많다. 좀 밝게 해달라거나 보정을 하지 말아달라거나 하는 요구사항을 해도 전혀 반영되지 않고 일률적으로 auto로 세팅되어 있는 대로 스캔을 해서 주는데, 그래서 마음이 상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계속 코스트코 스캔을 이용해 왔던 이유는 주변에 널린 FDI 현상소에서 하는 것보다는 품질이 그나마 낫고 가격도 쌌기 때문이다. FDI에서 스캔을 하면 정말 봐주기 힘들 정도로 해주는 데다 필름 한 롤에 5000원 이상 받는다. 그리고 중요한 다른 이유는 집에서 하는 필름 스캔에 대해 위 후배 또는 주위에서 줏어들은 얘기 때문이다. 스스로 스캔을 하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같이 입을모아 그것이 인내로 점철된 수행과도 같은 작업이라며 웬만하면 발을 들여놓지 말기를 권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조금 두려움을 가지고 그냥 지내왔는데 최근들어 호기심이 두려움을 넘어서게 되었던 것 같다. 도대체 어느 정도길래 그렇게들 얘기하는지, 그리고 정말 내가 원하는 사진을 필름에서 뽑아낼 수 있는지에 대해 꼭 한 번 직접 확인을 해 보고 싶어졌다. 그렇게 해서 필름 스캐너를 구입하기로 결심을 하고, 어느 정도 제대로 된 성능을 내는 물건이 뭐가 있는지 조사를 한 끝에 이 물건을 어렵사리 구하게 되었다.

코니카미놀타 디미지 스캔 엘리트 5400 II
[KONIKAMINOLTA DiMAGE Scan Elite 5400 II]


최대 5400dpi 해상도에다 다이나믹레인지도 높고 먼지제거 기능인 Digital ICE를 내장한, 꽤 훌륭한 스펙이면서도 가격은 상대적으로 저렴한 놈이다. 보급형과 고급형의 중간 단계쯤 되는 물건으로, 이 정도면 본격적으로 필름 스캔을 하기에 부족하지 않다는 평이 대부분이어서 구하기는 쉽지 않지만 이걸로 결정을 하여 찾고 찾아 구입을 했다.


위: 코스트코 스캔
아래: Scan Elite 5400 II
PENTAX ESPIO 928 + Agfa ULTRA 100

같이 들어 있는 번들 소프트웨어로 스캔한 것이다. 이건 그냥 견본으로 해 본 것이라 스캔 품질에 있어서 개선의 여지는 많다. 처음이라 옵션을 어떻게 주는지 잘 몰라 그냥 대충 한 것도 있고, 번들 소프트웨어 말고 실버패스트 같은 스캔 전용 소프트웨어를 사용하면 훨씬 나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 나는 기쁘지 않다.

오히려 좌절로 가득 찬 마음뿐이다. 필름 스캔이란 작업이 이런 것이었나. 마치 동경하고 사모해 오던 아가씨를 어렵게 만나 정성스런 작업 끝에 사귀게 되었건만, 실제로 함께 지내게 되자 그 동안 품었던 환상과 이미지가 차례로 무너지며 정신세계가 참혹하게 붕괴되는 걸 느끼는 기분이랄까. 집에 있던 필름을 한 롤 스캔하면서 느낀 감정이 딱 그런 것이었다.

뭐 제대로만 한다면 상당히 좋은 사진을 뽑아낼 수가 있다는 건 맞는 얘기 같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 위해 걸리는 시간과 노력이 과연 그 결과를 얻기 위해 감수할 만한 수준인가는 사람마다 기준이 달라 판단이 갈릴 거라고 본다. 나에게 있어서는 전혀 아니다. 밤에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 잠자리에 들기까지 그 얼마 되지 않는 시간을 사진 몇 컷을 스캔하고 보정하는데 모조리 허비한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꼭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것 말고도 그 기다림의 순간이 더 문제였다. 성질 급한 나에게는 그 눈에 보일락말락하는 속도로 징징거리며 스캔이 되는 모습을 초조하게 지켜보고 있는 것이 더할나위 없는 고통이었다.

물론 이것은 위에서도 말했지만 사람마다 다른 것이다. 내가 원하는 한 장의 사진을 얻을 수 있다면 그 정도는 감수할 수 있다는 사람이나, 천성이 느긋하여 기다리는 것에 안절부절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필름 스캔이라는 것은 충분히 할만한 일일 수 있다. 단지 나에게는 아니었다는 얘기다. 내가 발을 담가서는 안 되는 영역이었다.

필름 스캐너를 구입한 바로 그 날, 다시 팔아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무리 예쁜 아가씨가 사귀자고 해도 나와 맞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오늘도 새삼 인생의 평범한 진리를 이런 사소한 일상을 통해 깨우쳐 간다.

덧글

  • 루크 2006/11/08 14:18 # 답글

    저와 같은 것을 쓰셨고 같은 생각을 하셨었네요.^^;
    전 아직까지 갖고는 있지만 곧 처분하지 않을까합니다.
    곧 나올 펜탁스의 신기종 영향도 있고해서...
    다시 디지털을 주로 하고 필름은 가끔씩 아쉬울때 만져보지않을까 하네요.
  • 랭보 2006/11/08 15:25 # 답글

    정말 필름 한 통 스캔해 보고 5일만에 다시 팔아 버렸습니다. ㅎㅎ
  • 가야 2007/02/19 18:03 # 답글

    필름 스캐너를 보고 있었는데, 이 글을 보니 마음이 확 가시네요. ㅎㅎ 고마워요~
  • 랭보 2007/02/20 08:48 # 답글

    너무 매니아처럼 파고들어 가면 심신이 피로해지니까 저는 그냥 돈 주고 해 오는 스캔으로 만족하고 살기로 했습니다.
  • zenzang 2007/03/03 14:32 # 답글

    팔랑거리며 들어왔다가..지름신을 잠재우고 갑니다. 당분간은..ㅋ
  • 랭보 2007/03/05 13:44 # 답글

    본의 아니게 여러 사람의 지름 의지를 꺾게 되어 심심한 사과의 말씀 드립니다. ㅡ.ㅡ;;
  • 호준아범 2007/04/07 23:35 # 삭제 답글

    저는 거꾸로입니다. 거의 포기하고 있었는데 님의 글을 보고 나니 오기가 생기는데요? 평판 스캐너 중 필름 스캔 기능이 있는 걸로 도전해보고픈 마음. 그런데 엄청난 시간이 걸린다는 말씀에 다시 주저 주저......
  • 랭보 2007/04/11 09:15 # 답글

    꼭 먼지제거(ICE) 기능 있는 걸로 구입하세요. 눈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스캔해보면 필름 표면에 먼지가 아주 많습니다. 그런데 ICE 기능을 켜놓고 스캔하면 또 정말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이럴수도 없고 저럴수도 없고... ㅜ.ㅜ
  • 로직 2007/07/10 16:20 # 삭제 답글

    후기 정말 인상적입니다 뒷부분은 가슴에 쫙달라붙는데요 피름스캐너 검색하다 왔는데 접어야 겠습니다 정말 잘보고 갑니다
  • 랭보 2007/07/11 08:54 # 답글

    이 사용기는 사람들의 구매욕을 잠재워 산업 발전을 저해하는 나쁜 사용기입니다. ㅡ.ㅡ;;;
  • 엑센 2007/07/15 19:20 # 답글

    현상 스캔을 한롤당 사천원 주고 하자니 쩐의 압박이 슬슬 와서 싼 필름스캐너 하나 장만할까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구매욕구가 확 가시는데요-_-;;;; ㅋㅋㅋ 여튼 사용기 잘 봤습니다 ^^
  • 랭보 2007/07/16 14:59 # 답글

    또 한 건 했네요. ㅡ.ㅡv
  • 2007/07/17 05:06 # 삭제 답글

    전 토이카메라를 갖기도 전에 대책을 강구하던중 필름스캐너를 10분전에 발견하여 가격에 입이 쩍벌어진후 이곳까지 흘러오게되었는데 앞의 많은 분들처럼 그냥 ..
    좋은 정보 정말 감사합니다 ^.^
  • 행인3 2007/07/21 21:45 # 삭제 답글

    저도 필카에 관심이 많아서 필름스캐너를 검색하다가 이 포스트를 읽게 되었는데.. 역시 저에게는 무리인 것 같군요. 그냥 제 조강지부 디카에게 돌아가야겠습니다.
    쓸데없는 금전의 지출을 피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ㅎㅎ
  • 쎄옹 2007/10/21 01:01 # 삭제 답글

    헉... 필카의 매력땜에 무턱대고 하나 장만했는데..
    스캐너의대한 의견이 이렇게 매정할 줄이야...
    다시 재고 해봐야겠슴돠.. 미리 알았더라면.. 필카도 지르지 않았을터인데.... T.,T
  • 랭보 2007/10/22 20:35 # 답글

    장만했으면 잘 쓰셔야죠.
    성격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저는 워낙 성질이 급하기도 하고 이것저것 기웃거리는 소일거리가 많아서 도무지 스캔하는 시간을 견뎌내기 힘들었지만, 꾸준히 진득하게 사진 활동을 하는 사람이라면 필름스캐너도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 스티비 2008/08/26 21:14 # 삭제 답글

    와~ 정말이지... 큰일날뻔 했군요... 정말 지르심 왕림하셔서
    둘러보던 차에.. 제대로 퇴마사 만났습니다!!!
    차라리 연회비가 있어도 코스트코를 가야겠군요...
    퇴근하고 몇 시간이나 쉰다고... 그 짓을 하려했던 제 생각이
    환상속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갑니다!
  • 스티비 2008/08/26 21:16 # 삭제 답글

    저기...근데... 그래도 한 번은 써보고 싶다는 잔지름신이 남아
    있네요... 아~~ ;;;;
  • 랭보 2008/08/28 21:25 #

    그걸 완벽하게 잠재우는 방법은 저처럼 일단 한번 사 보는 것뿐입니다.ㅎㅎ 그래서 의외로 성격에 맞으면 계속 쓰는 거고요.
  • 2019/04/15 22:56 # 삭제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랭보 2019/04/18 22:32 #

    아뇨. 팔아버린지 아주 오래 됐죠~
    이 사용 후기 쓰고 얼마 안 되어서 팔았어요. 이렇게 힘든 작업을 계속 할 엄두가 안 났거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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