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리볼(밤과자,상투과자)의 어원에 대하여 세상의 모든 지식

지금은 거의 사라졌지만 내가 어렸을 때엔 동네마다 생과자를 구워 파는 가게가 한 군데 정도는 있었다. 겨울날 저녁 입이 심심하신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천원짜리 한두 장 쥐고 생과자집으로 달려가던 기억이 난다. 담배 심부름을 갈 때와 비교해서 그럴 때의 내 얼굴은 웃고 있었던 것 같다. 담배는 사와 봐야 먹지도 못하는 거라 달갑지가 않았던 게다. 지금은 담배 심부름이라는 건 불법행위가 되어 세상 속에서 사라졌고 생과자 장사를 하는 사람은 이제 과자를 가게가 아닌 트럭에서 만든다. 이것도 벌써 25년 전 이야기가 되었다.

생과자 가게에 가면 꼭 있었던 이 과자를 나는 밤과자라 불렀다. 나만 그렇게 불렀던 건 아니고 다른 사람이나 가게 주인 아저씨에게도 그 이름이면 통했다. 나중에 나이가 들어서는 구리볼이라는 이름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주로 과자를 굽는 그쪽 업계의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 과자를 구리볼이라 칭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별 생각없이 평화롭게 살고 있던 와중에 갑자기 이상한 이름이 나타났다. 그게 바로 상투과자라는 이름인데 어느새부턴가 이 과자를 상투과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늘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맛집'이나 '맛나다' 같은 말이 활개를 치는 걸 느꼈을 때처럼, 나는 이 '상투과자'라는 말을 인터넷에서 자주 보게 되자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상투과자라는 말을 보게 된 건 불과 몇 년 전부터이고 그 후로 인터넷 상에서 특히 많이 퍼지게 되었다. 아마 이것도 처음에는 일 벌이기 좋아하는 어떤 호사가의 작품이었을테고, 유난히도 온라인 상에서 뭔가 남과 다른 언어를 쓰려고 하는 사람들의 알 수 없는 별난 심리로 인해-'맛나다'라든지 '맛집', '그닥', '나름' 같은 말들이 이렇게 해서 현재 전염병처럼 온 천지에 퍼져 있다- 이렇게까지 이 과자의 이름에 대한 시장점유율(?)을 올려 온 것일 게다.

이미 잘 쓰고 있는 이름이 있는데 굳이 출생도 알 수 없는 상투과자라는 말을 만들어서 사용할 필요가 있는지, 그저 좀 독특하고 새로운 말이다 싶으면 일단 쓰고 보는 온라인 군중 심리에 대한 반감이 겹쳐서 나는 이 상투과자라는 이름에 거부감이 생겼다. 구리볼이 일본어 같아서 꺼림칙하면 밤과자라 하면 된다. 그런데 이 과자가 어짜피 일본에서 온 일본과자라면 고유의 이름을 우리말로 바꾸어 불러야 하는 의무가 있는 건 아니라 생각한다. 이를테면 타코야키는 타코야키일 뿐이지 이걸 문어풀빵 같은 식으로 굳이 우리말로 순화할 필요가 있냐는 얘기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하고 있던 와중에 뭔가 개운하지 못하고 일말의 불안한 기운을 느끼는 점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이 과자가 정말 일본에서 들어온 과자가 맞냐는 것이었다. 그래서 확인을 위해 일단 일본 웹사이트를 검색해 보기로 했다. 일본과자라면 구리볼이라는 이름 역시 일본어일테고 그러면 그 이름을 유추해 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밤과자라고도 했겠다, 일본어로 밤(栗)이 구리(くり)이니 이 부분은 거의 확실했고, 뒤의 볼은 동글동글한 과자니까 영어의 ball이라 생각했다. 뭐 간단한 것 아닌가.

하지만 저렇게 해서 유추한 일본어 단어로 백날 검색을 해 보아도 전혀 이 과자가 나오지 않았다. '밤'이라는 말과 '볼' 또는 '과자', '화과자', '양과자','생과자','구운과자','막과자' 다 조합을 해 보아도 저 사진과 같은 놈이 검색되지 않자 그때부터 좀 당황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이게 일본 과자가 아니었단 말인가. 그럼 구리볼이란 건 어느 나라 말이지? 우리나라? 그런다면 이 과자가 왜 일본 생과자들 사이에 끼어 있는 거지? 도대체 이 놈의 정체는 뭐야??? 나는 혼란스러워 뭐가 뭔지 알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그 이후 어떻게 다시 평정을 찾고 어찌어찌 더 잘 조사를 해 보았는지에 대해서는 생략한다. 결론을 말하자면 구리볼은 일본과자가 맞았다. 지금 이 페이지에 올린 저 사진도 일본 사이트에서 무단으로 퍼 온 것이다. 정확한 이름이 구리볼이 아니어서 검색이 되지 않았던 거다.

저 과자의 이름은 '구리보오로'이다. 일본어로 쓰자면 '栗ボーロ'이고 히라가나로 '栗ぼうろ'라 쓰기도 한다. 볼이 아니라 원래는 보오로였던 거다. 그럼 보오로는 뭐지?

보오로(ボーロ) :
포르투갈어 bolo에서 온 말로, '보오로'란 포르투갈어로 '케익'의 의미임. 밀가루에 계란 설탕 등을 첨가한 후 모양을 만들어 구운 과자. 16세기에 포르투갈로부터 일본에 전해져 남만과자(南蛮菓子)라는 과자의 한 종류로서 일본화 되었음. 남만인이 전해 온 과자라는 뜻인데 여기서 남만인이라는 건 서양인을 의미함. 그 모양과 성분에 따라 '마루보오로(丸ボーロ)','다마고보오로(たまごボーロ)','밀크보오로(ミルクボーロ)','구리보오로(栗ボーロ)' 등의 다양한 이름으로 판매되고 있음. 특히 '마루보오로(丸ボーロ)'는 사가시(佐賀市)를 시작으로 하여 규슈지방의 토산과자로 유명함.


조사한 바에 의하면 구리보오로는 가고시마 지방의 토산과자로 유명했던 것 같다. 그리고 인터넷으로 검색한 페이지마다 '그리운 맛'이나 '예전의 그 맛'이라는 표현이 자주 나오는 것을 보아, 지금은 조금 흘러간 옛 과자로서 인식되고 있는 듯했다. 가격은 싼 건 한 봉지에 천원 정도로 역시 저렴한 서민과자인데, 진짜 밤을 넣어 비싸게 파는 고급품도 있었다.

아무튼 일제시대 무렵에 이런 생과자들이 일본에서 들어와서 일본 이름으로 팔렸을 것이다. 구리보오로도 그 중에 한 가지였을 테고 보오로라는 말이 와전되어-이 카테고리의 '잘못된 연상에 의한 오류' 글에서 언급한 원리와 동일하게- 볼이라고 바뀌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지금은 구리볼이라는 이름의 과자로 우리 곁에 살아 남아 있다.

구리볼은 그냥 그대로 구리볼이나 밤과자라 불러도 좋다고 생각한다. 밤과자라는 이름에는 이미 우리말 순화를 위해 그 나름대로 애쓴 옛사람의 흔적이 들어 있다. 상투과자라는 새로운 이름까지 만들 필요는 없고 또 실제로 상투와도 닮지 않았다. 내가 보기엔 꼬막이랑 닮은 것 같은데 그렇다고 꼬막과자라 불러야 할까. 나는 그렇게까지 호사가가 아니고, 그냥 구리볼은 구리볼로 맛있게 남아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관련글 : 구리볼과 상투과자)

덧글

  • 리베 2007/07/11 17:35 # 삭제 답글

    동네마다 좀 다른거 같아요, 구리볼이라고 부르는건 처음 알았네요, 저는 조개과자라고 불렀고 그냥 아저씨들도 그러면 알아서 주시더라구요...
  • ^^ 2007/07/11 18:17 # 삭제 답글

    저는 저 과자에 대한 최초의 기억부터 상투과자로 불러왔기 때문에 다른 이름이 있었다는 사실도 몰랐네요. (30대 후반. ^^)
    생과자 트럭 오면 오랜만에 사먹어 봐야겠습니다.
    좋은 글 잘 보고 갑니다.
  • 유즈 2007/07/11 18:58 # 삭제 답글

    저는 항상 그냥 통칭 생과자;;;

    근데 굳이 구리볼이라고 해봐야
    우리는 이해도 안되고(왜 이게 구리볼인데...
    무슨뜻인데...싶은 마음)

    밤과자도..별로 이게 밤맛이야 하면서 먹은적도 없어서;

    전 상투과자 좋은데요.
    밤과자는 밤빵도 있고 비슷한 종류도 있으니까..

    상투과자 하면 딱 얘만 생각나잖아요..
  • hanfusa 2007/07/11 23:06 # 삭제 답글

    지역마다 다른건가요?
    저도 어렸을 때부터 상투과자라고 불렀습니다.

    음식 게시판이나 블로그 포스팅 보면서
    구리볼이라는 이름이 있다는 걸 알았구요.
    저에겐 오히려 상투과자가 친숙한 이름입니다-
  • An_Oz 2007/07/11 23:16 # 답글

    저도 밤과자였어요 '3'/ 경상북도였는데, 구리볼은 서울 와서 처음 들었고요. 상투과자는 최근에 들려온... 기준이 뭔지 모르겠어요 -ㅂ-
    그러고보니 손톱만한 크기의 밀크볼로는 가끔 수입된 걸 볼 일이 있는데, 호기심에 사봤더니 겁나 맛없더라고요 (...)
  • comsil 2007/11/21 13:12 # 삭제 답글

    저는 상투과자
  • 유리 2007/11/21 21:05 # 삭제 답글

    어릴적에 아버지가 퇴근길에 가끔사다주셨는데 아버지는 그걸 밤과자라고 하셨어요. 싫증나서 싫어하게 되었는데도 아버지께선 참 꾸준히도 사주셨지요.
    연달아 3개이상 먹으면 꼭 한모금씩 물을 먹어줘야했는데 두개입에 넣고 물한모금 마신다음 물이 과자에 스며들때까지 기다렸다가 오물오물 녹여먹던 기억이 나네요.^^
  • 랭보 2007/11/22 09:39 # 답글

    comsil// '저는 상투과자'라는게 무슨 소리인지요.

    유리// 뻑뻑한 식감때문에 입에 꽉 차는 듯한 그 느낌을 좋아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단맛 때문에 더 잘 먹었죠.
  • 수정부 2013/04/27 17:11 # 삭제 답글

    전 40대 후반의 서울 토박이 입니다만 어릴때부터 밤과자라 칭해왔습니다.
  • 유빵끼 2015/12/23 23:49 # 삭제 답글

    이 밤과자 레시피에 아몬드 가루가 들어가는 데 마지판marzipan 계통의 과자가 전해져서 변형된 것은 아닐까 추측하고 있습니다.
  • 랭보 2016/01/04 22:39 #

    마지판이라는 것이 구리볼과 관련있다고 보기에는 둘이 너무 다른 것 같아 좀 무리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만...
  • 상크스 2016/07/20 16:50 # 삭제 답글

    구리볼 검색해 보다 찾아왔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 랭보 2016/07/22 03:23 #

    거의 10년 된 글에 기꺼이 덧글 남겨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 구리볼 2018/02/16 11:52 # 삭제 답글

    저역시 구리볼이라는게 단어의뜻을 찾다 좋은글 읽고갑니다
    랭보님 수필집 내셔도 되겠어요
  • 랭보 2018/02/20 15:30 #

    구리볼님, 11년 된 글에 덧글 남겨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 유래를 찾아서 2019/04/14 12:57 # 삭제 답글

    2019년에도 잘 읽고 배워갑니다. 저는 서울 출생에 외국 나가서 산 지 20년이 되었는데 상투과자라는 말은 처음 듣고 갑니다. 전부터 구리볼이라고 했던 것 같아요. 소보루빵처럼 일본어에서 나온 말이었군요.
  • 랭보 2019/04/18 22:31 #

    12년 된 글에 덧글 남겨 주셔서 고맙습니다 ㅠㅠ
    유래를 찾아 오셨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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