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처음 이쪽 지방을 여행했을 때 이미 이번 여행이 정해진 게 아닌가 생각한다. 그 때 아쉬웠던 점이 두 가지 있었는데 그걸 보완해서 내년에 또 오자고 마음먹었었다. 하나는 좀 더 넉넉하게 시간을 잡아서 오자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제대로 바다 속을 들어갈 수 있도록 준비를 해 오자는 거였다.
이번 여행은 7박8일로 여전히 넉넉하지 못하다. 그나마 지금 다니는 회사 기준으로는 말도 안되게 장기간인 이 휴가를 내느라 얼마나 눈치를 보았는지. 이거의 두 배면 딱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지만 그 정도 기간의 여행을 하는 건 아마 앞으로도 없을 것 같다. 회사를 다니는 한 이보다 더 길게는 불가능할테고 백수가 된다면 그보다 훨씬 길게 잡고 여행을 떠날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다른 한가지에 대해서는 다르다. 나는 시간은 없지만 푼돈은 있는 회사원이니까. 휴가를 잡는 건 돈으로 안 되지만 바다에 들어갈 준비를 하는 건 돈으로 된다. 이런 걸 생각해 보면 시간은 금이라는 말이 좀 다른 의미로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시간과 돈은 내가 원하는 바와는 무관하게 세월에 따라 서로 교환이 된다. 어렸을 땐 시간은 남아돌고 고기 한 점 사먹을 돈조차 변변히 없었는데, 언제부턴가 그 많던 시간들은 엿바꿔 먹었는지 없고 주머니엔 푼돈 몇푼이 생겼다. 그 비율은 항상 극단적이라서 절대로 둘 다 적당히 있는 경우란 없다. 결국 지금의 난 예전엔 손가락만 빨고 바라보던 기타며 베이스며 게임기며 사재기 할 수 있지만 결국 그건 과거의 아쉬웠던 기억에 대한 심리적인 보상일 뿐 사실은 그걸 만질 시간조차 없어서 방구석에서 썩어 간다.
아무튼 이번 여행은 다이빙 위주의 여행을 하기로 마음먹고 오래 전부터 이것저것 준비를 했다.
이것들이 다 돈지랄의 결과들이다.
작년까지만 해도 저딴것들이 뭔지도 몰랐던 걸 생각해 보면 확실히 이번 여행은 벼르고 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준비성 좋은 일본 사람들 덕분에 나까지 덩달아 여행 준비도 몇 달 전부터 시작했다. 나하까지의 항공권은 아시아나 마일리지로 어찌어찌 해결했고, 나하에서 이시가키까지 일본 국내선 항공권은 두 달 전부터 설쳐댄 덕분에 꽤 싸게 샀다(편도 7,000엔 정도). 이렇게 서둘렀는데도 이시가키의 숙소 중 위치가 좋은 곳은 이미 방이 없었다.
이번 여행을 위해 가방도 새로 샀다.
꺼멓고 큰 부분에는 다이빙 장비를 다 쑤셔 넣으면 되고, 오른쪽 부분에는 옷가지나 그냥 짐들을 넣으면 된다. 두 부분은 합체도 되고 이렇게 분리도 되고 해서 여러모로 편하다. 근데 크기도 그렇고 무게가 장난이 아니다.
집을 다 싸고서 가방을 보니 참 대책이 안 선다. 내가 무슨 이민가는 놈도 아니고 일주일 놀러 가는건데 아주 한 살림을 차려 가는 것 같다. 무게를 재어 보니 23kg쯤 된다. 무게를 재는데도 생쑈를 했다. 집에 있는 체중계가 너무 작아서 가방이 제대로 올라가지 않길래 나름대로 짱구를 굴린답시고 내가 가방을 들고 올라가서 가방과 내 몸무게를 함께 쟀는데 그러다 허리가 삐끗한 것이다. 그냥 대충 가져 가서 무게 초과되면 돈 더 내면 될 걸 가지고, 이게 다 소심함 때문이다. 그저 남한테 아쉬운 소리 하는 걸 어려워 해 가지고...
공항 가서 발권할 때 보니 결국 저 가방은 23kg가 맞았지만 깐깐한 노쳐녀같은 인상의 아시아나 직원은 별 군말이 없었다. 역시 사람을 겉모습으로만 판단하면 안된다고 생각하면서 앉아 있으려니 뭐가 문제가 있다고 다시 부른다. 내 짐이 수하물 X-ray 검색에 걸렸단다. 주위 사람들의 수상하게 보는 눈초리를 받으며 사무실로 들어가 보니 짐 속에 칼이 있어서 그런건데 다이빙 장비같으니 라이센스를 보여달라고, 다이빙 인정증 보여주고 번호 적고 그렇게 대충 마무리가 되었다. 다음번부터는 다이빙나이프 같은건 놔두고 가야겠다.
비행기랑 기내식 사진은 찍지 않았다. 뭐 비행기 처음 타는 것도 아니고 그런 사진은 이젠 졸업해야지 하고 생각을 했으나...
위의 첫번째 사진을 찍고 보니 작년에 처음 나하에 도착했을 때도 똑같은 곳에서 사진을 찍었던 기억이 난다. 의연한 척 해봤자 작년이나 올해나 변한 게 없다.
나하 공항에 도착하니 숨쉬는데 뭔가 뜨거운 것이 뭉클 하고 들어 온다. 괜히 기분이 좋아진다. 나는 더위를 무지하게 많이 타고 땀도 장난아니게 흘려서 여름만 되면 살기가 힘든 인간이지만, 그래도 여기엔 이런 게 어울린다. 날씨도 좋고 하늘도 푸르다.
바퀴달린 가방을 질질 끌면서 여행을 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배낭을 매거나 보스턴백 같은걸 들고 가는게 더 여행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항상 짐도 그정도만 쬐끔 싸서 짊어지고 다녔다. 작년에 오키나와 왔을 때는 중딩 학교갈 때 쓰는 배낭 크기로 하나 딸랑 매고 왔는데. 이번엔 23kg 여행용 롤러백을 돌돌돌 끌고 온 된장남이 되어 버렸다.
공항 앞에 바로 있는 유이레일 나하공항역에서 마침 모노레일이 나가고 있었다. 작년엔 저걸 타고 나하 시내도 가고 슈리성도 가고 파인애플 머리를 한 아이가 귀여웠던 게스트하우스에도 갔었지. 하지만 이번 여행에서는 오키나와 본섬을 보는 일은 없을 거다. 아마 앞으로도 직장을 그만두기 전까지는 없지 않을까.
나하 공항에서 국내선으로 갈아타고 바로 이시가키로 가려 하였으나...
난관이 하나 있었다. 오기 전에 JAL 운송규약을 봤는데 국내선 수하물은 15kg까지라고 되어 있었던 거다. 내껀 23kg인데... 20kg제한에 23kg라면 뭐 애교로 봐 주겠지만 15kg제한에 23kg면 좀 미묘한 수치다. 이걸 또 어떻게 설명하면서 아쉬운 소리를 해야하나 하고 투덜대며 체크인을 하는데 나긋나긋하게 생긴 JTA의 직원 왈, 이시가키 노선에서는 다이빙 장비라면 괜찮다고 그러면서 친절히도 다이빙이라고 쓰여있는 취급주의 택을 붙여준다. 괜히 걱정 했다.
이시가키로 가는 중에 내려다본 미야코지방의 모습.
첫 번째 사진에 삐죽하게 보이는 섬은 미야코지마(宮古島)이고, 두 번째와 세 번째 사진의 둥그렇게 생긴 섬은 오른쪽 부분이 이라부지마(伊良部島), 왼쪽 활주로가 있는 부분이 시모지지마(下地島)이다.
이시가키로 가는 비행기는 20분 정도 연착을 하였다. 이놈의 비행기가 도쿄에서 오는 놈들을 태워가지고 가야 하는 관계로 트랜스퍼 승객 처리때문에 그런 것 같다. 나하-이시가키 노선에건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나는 듯하다.
날씨가 좋아서 구름도 별로 없고 비행기 밖 경치가 아주 끝내준다. 어디까지가 바다고 어디부터가 하늘인지 모를 정도로 바깥이 온통 푸른색이다. 처음에 비행기 사진 같은건 이제 그만 찍기로 했었는데 다 집어치우기로 했다. 근데 JTA 놈들 비행기 좀 잘 닦고 다녀야 할 것 같다. 창문에 무슨 구정물 흐른 자국이 있어서 사진이 영 구리다.
나하에서 이시가키까지야 뭐 금방 온다. 기내 서비스로 주스 한 잔 주면 융숭하다 할 정도로 가깝다.
여기 이시가키 공항에 오면 이제 낙도 분위기가 슬슬 난다. 공항이라고 해도 우리가 흔히 보는 공항과는 달리 낙도풍이라 할 만한 점이 몇가지 있는데, 일단 도착하면 이렇게 비행기에서 직접 내려 공항 건물까지 걸어서 간다. 별거 아니지만 이 순간이 참 운치 있고 앞으로의 여행에 대한 기대로 기분이 설레인다. 비행기가 무슨 시외버스 같은 느낌으로 정겹게 느껴진다.
활주로 한 켠을 보니 하테루마 혹은 요나구니로 가는 RAC(류큐 에어 커뮤터)의 소형 프로펠러 쌍발기가 출발준비를 하고 있다.
또 하나 낙도 공항다운 건 활주로가 짧아서 비행기가 뜨고 내릴 때 좀 오바를 한다는 점이다. 착륙할 때는 땅에 내리고 나서 다른 공항에서와는 비교가 안 되게 열라 급브레이크를 밟는다. 이륙할 때는 더 웃기다. 보통 다른 공항에서는 활주로까지 가서 출발선에 선 다음 처음엔 좀 살살 가다가 중간쯤부터 속도를 내어 이륙하는데, 여기선 출발선에 딱 서서는 비행기가 한참 마음의 준비를 한다. 그리고 준비가 끝나면 그때부터 바로 급가속이다. 슬슬 가고 그러는 워밍업 그런거 없다. 그렇게 있는 힘껏 도약을 해도 이륙하는 포인트를 보면 활주로 거의 끝까지 다 가서 올라가더라.
이런 점 때문에 지금 이시가키 신 공항을 만들고 있는 중이다. 새 공항은 이시가키 시내에서 한참 떨어진 곳이라 별로 내키질 않는다. 언젠가는 이 공항도 리토산바시처럼 폐쇄되겠지 라는 생각을 하면 좀 우울하다.
공항에서 나와 일단 담배를 한 가치 피웠다. 여기까지 작년이랑 동일하다. 이리오모테의 숙소에 갈 때까지는 거쳐야 하는 과정이 작년 여행에서 했던 것과 똑같아서 뭐 아주 익숙하다. 단지 저놈의 23kg짜리 무식한 가방만 빼고는.
택시를 타고 리토산바시를 외치면 아저씨가 알아서 잘 가 준다.
이제 예전의 리토산바시는 없어졌고, 새로 리토터미널이 생겨서 거기서 배를 타고 이리오모테로 가야 한다. 공항에서 쬐끔 더 멀어져서 택시요금도 좀 더 나오는 것 같다. 이시가키의 택시는 도쿄랑 비교해서는 요금이 꽤 싸다. 기본이 390엔에 60씩 올라가는데 공항에서 리토터미널까지는 930엔 나왔다. 이정도면 뭐 탈만 한 수준이다.
새로 생긴 리토 터미널은 정말 어리둥절할 만큼 크고 깨끗했다. 게다가 에어컨까지 빵빵하게 나오니 예전처럼 바깥에 벤치에 앉아서 땀 삐질삐질 흘리면서 맥주나 들이키고 하지 않아도 되어서 좋았다. 옛 정취는 가고 신식이 오니 편리해서 좋지만 좀 허전하긴 했다. 뜨내기 여행자인 나에게도 이런 느낌인데 오랫동안 여기를 다녔던 사람들 중에는 꽤나 아쉽게 느끼는 이도 있을 것 같다.
대충 표를 사고 배를 타고 이리오모테로 간다. 이제 이 배를 타는 요령 같은 건 뭐 익숙하다. 괜히 바람 쐬고 경치 본답시고 바깥 자리에 앉는 객기를 부리면 안된다. 더워서 쪄죽으니 군말없이 에어컨이 나오는 실내로 들어가야 한다. 들어가서는 앞쪽으로 가지 말고 가능한 한 뒤쪽에 앉아야 한다. 파도를 헤치며 갈 때 배의 앞부분이 뒤보다 더 위아래로 요동치기 때문이다. 괜히 앞에 앉아서 테레비나 보고 히히덕대다가는 10분만 지나면 지옥의 배멀미의 고통에 신음하게 된다.
이시가키에서 이리오모테까지는 40분이면 간다. 옆에 갓 스물 쯤 되어 보이는 여자 아이가 앉았는데 귀여워 보이는 입으로 계속 과자를 꼬물꼬물 먹으며 간다. 나는 혹시나 해서 멀미약을 먹을까 했는데 그냥 귀찮아서 관뒀다.
열 달만에 다시 오는 이리오모테의 우에하라 항구는 뭐 여전했다. 단, 전에는 내가 여기 도착하자마자 멀미때문에 사경을 헤맸지만 지금은 꺼떡없다는 점, 그리고 그때는 처음 발을 딛는 낙도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면 이번엔 그래도 낯이 익어 느긋하다는 점 정도가 다르다고 할까.
그래도 짐 가지고 낑낑대며 숙소까지 걸어가야 한 건 똑같았다. 숙소인 칸피라소는 항구에서 가까워 뭐 별 문제는 아니지만, 알아서 마중 좀 나와주면 어디 덧나는 것도 아닌데 라고 투덜대며 걸었다. 날씨가 무슨 한증막 같아서 딱 100미터 짐 끌고 가니까 아주 죽을 것 같았다.
이번 여행에서 이리오모테에 있는 동안 신세지게 될 곳은 '칸피라소'라는 곳이다. 한국어 홈페이지까지 있는 곳이라 국내에도 상당한 인지도를 갖고 있는 숙소인데(거짓말임 -_-;;), 그래서 그런지 예약도 한참 전에 안하면 방 잡기도 힘들다. 작년에 묵었던 '마루마소'라는 곳도 꽤 나쁘지 않았지만 매번 여행마다 다른 곳에서 묵어보자는 생각으로 이번에는 여기로 했다. 그리고 여기는 거실 공간에서 사람들하고 어울릴 수도 있다고 해서 좀 더 끌렸다. 작년의 '마루마소'는 그런 공간이 없어서 밤에 외로움을 달래려 혼자서 고독한 드라이브를 하며 도로위의 게를 빠개거나 했던 아픈 기억이 있었기 때문에.
땀범벅이 되어 숙소에 들어서니 거실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졸라 측은한 눈빛을 건네며 쳐다본다. 23kg의 짐만 없었어도 상쾌하게 들어왔을 텐데 처음부터 이미지를 좀 구겼다. 대충 숙박계를 적고 방에 올라와 코인쿨러에 100엔을 넣고 에어컨을 열라 틀어대니 좀 살 것 같았다. 밤을 위해 100엔짜리 동전을 많이 만들어 와야 한다. 안 그러면 절대로 잘 수 없다.
에어컨 바람을 쐬며 대짜로 누워 있으려니 일하는 언니가 와서 전화가 왔다고 빨리 받으라고 한다. 예약해 두었던 다이빙샵에서 확인차 방문한다고 전화가 온 거다. 얼렁 거실로 내려가보니 성격 좋아 보이는 언니가 날 기다리고 있다. 내가 예약한 곳은 'Mr.사카나'라는 다이빙 샵인데, 보트가 이 샵 것이 제일 좋아보이길래 골랐다. '타노 마리코(田野 MARIKO)'라는 이름의 이 언니는 다이빙샵 인스트럭터인데 예쁜 얼굴은 아니지만 성격이 정말 좋고 3일동안 참 잘 대해 주었다.
이래저래 다이빙 신청서를 작성하고 거실에 있던 사람들이랑 통성명이나 했다. 그 중에 자기도 Mr.사카나에서 계속 다이빙했다는 한 아가씨가 유독 붙임성있게 말을 걸어서 한참 얘기했다. 자기는 '유미'라고 오사카에서 왔는데 일주일 내내 다이빙 계속 하다가 내일 이제 떠난다고, 같이 다이빙 했음 좋았을 텐데 아쉽다고, 있다가 저녁때 같이 한잔 하자고, 뭐 그런 얘기들을 쭈욱 했다. 근데 오사카 출신이란 건 얘기 안 해도 알 정도로 오사카 사투리를 엄청 쓰더라. 내가 잘하는 일본어가 아니지만 오사카 사투리는 금방 구분이 간다. 다이빙에서 큰놈들을 좀 많이 봤으면 좋겠다고 내가 말하니 자기 카메라를 가져와서는 자기가 찍었던 것 중에서 큰놈들 사진만 골라서 보여준다. 다랭이나 곰치 같은 놈들...
저녁식사 시간까지는 시간이 좀 있어서 뭘 할까 생각하다가 그냥 산보나 하기로 했다. 조금만 걸어가면 '마루마비치'라고 비치가 있어서 바다에 좀 들어갔다 올 수도 있는데, 내일부터 질리게 다이빙 할 걸 생각하니 별로 내키지가 않아 관뒀다. 다이빙 때문에 하루 중에 아침부터 저녁식사 시간 전까지는 다 허비를 하니, 렌터카로 섬을 돌아다니기에도 시간이 애매하고 이번엔 본격적인 섬 관광은 좀 힘들 듯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이런 데 오면 그냥 시간을 보내며 빈둥대도 각별한 맛이 있어서 그것도 좋다고 생각했다.
무인매점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뭐가 있나 궁금해 들어가 보니 마침 유미짱이 안에서 할머니랑 뭐라뭐라 얘기를 하고 있다.
얘는 열흘쯤 여기 묵다 보니까 아주 할머니랑은 친구처럼 친해진 것 같아 보였다. 이때도 그 특유의 친화력에 말려든 할머니가 수박을 공짜로 주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마침 때를 잘 맞춰 들어간 덕분에 나까지 수박 한 덩이를 얻어가지고 유미하고 같이 가게를 나왔다.
숙소와 무인매점 맞은편에 있는 수퍼마켓도 그대로였다.
여기 수퍼 앞에 있는 벤치에 같이 앉아 수박을 먹었다. 수박이 새빨갛지도 아주 달지도 않았는데 부드럽기는 엄청 부드러운게 우리나라 수박하고 조금 달랐다. 둘 다 양 손하고 입 언저리를 다 적시고 땅바닥에 물을 뚝뚝 흘려가며 열심히 수박을 먹었다. 이런 곳에서는 이렇게 먹는 게 자연스럽다. 도착한지 이제 겨우 한두 시간밖에 안 됐지만 벌써 오래 있은 듯한 느낌이다.
대충 히히덕대며 놀다 보니 금세 저녁시간이 되었다.
여기 와서 다른 사람들에게 들은 건데 '칸피라소'는 이리오모테 숙소 중에서 식사가 꽤 좋기로 소문이 나 있는 것 같다. 이리오모테 뿐만 아니라 이쪽 오키나와 낙도에는 섬마다 제대로 된 식당이 거의 없어서 아침과 저녁을 주는 민숙이라는 숙소가 주류인데, 그렇기 때문에 숙소에서 나오는 식사도 이곳 여행에서 제법 비중을 차지한다. 여행에서 식도락을 즐기는 게 큰 부분인데 여기 여행에서는 숙소를 잘 고르면 어느정도 그 부분이 충족이 되니까 말이다. 따로 사 먹을 곳도 없고.
이날 저녁 메뉴는, 이름모를 사시미에 파파야 채썬 것, 이것저것 튀김(닭,오징어,새우), 샐러드, 옥수수, 고야무침, 우엉비슷한것무침, 국(메생이비슷한 해조류를 넣은 국), 그리고 과일(파인애플,파파야,용과) 정도였다. 항상 사시미와 과일은 메뉴에 들어 있어서 좋았다. 저 반찬에 먹다보면 밥도 엄청 먹게 되고 맛도 있고 식사는 정말 좋았다. 사시미 옆에 있는 게 난 처음엔 무채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고 파파야라고 했다. 어쩐지 씹는 느낌이 좀 다르더라니.
그리고 파인애플이 말도 안되게 달고 맛있었다. 파인애플 크기가 좀 아담한 크기로 작은 편인데 진짜 달다. 그리고 새로 나온 품종으로 '피치파인(Peach Pineapple)'이라는 게 있는데, 노란 빛이 좀 덜하고 파인애플 맛에 더하여 뭐랄까 코코넛 비슷한 특유의 향이 있었다. 복숭아맛이 난다고 피치파인이라는 것 같은데 가격도 보통 파인애플보다 더 비쌌다. 근데 나는 그냥 보통 파인애플이 더 맛있더라.
저녁을 먹고 또 슬슬 동네 산보나 했다.
작년에 묵었던 '마루마소'는 어떻게 되어 있나 궁금해서 한번 가 보았다. 뭐 여전히 그 숙소도 잘 있고 영업도 하는 듯 불도 켜져 있었는데 밤에 가서 그런지 어쩐지 좀 쓸슬한 분위기였다. 이 숙소는 앞에 뜰고 있고 나무에 해먹도 걸려 있고 큰 평상도 있고 바다가 바로 보이고 참 좋은 곳인데 난 혼자서 있으려니 좀 그랬었다. 밤에 술먹는 분위기도 아니고...
수퍼 근처에 있는 '우에하라관'이라는 숙소이다.
작년에 갔을 때도 그렇고 이번에 가서 보기에도 참 괜찮은 숙소 같아서 사진 좀 찍어 왔다. 민숙 같지 않고 건물도 번듯하고 하길래 처음에는 무슨 펜션 같은 걸줄 알았다. 일본쪽 사이트에 올라오는 사람들의 평도 하나같이 좋고 나쁜 얘기는 전혀 없어서 한번 묵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던 곳이다. 여럿이서 가는 여행에는 이곳도 참 좋을 것 같은데, 혼자일 때는 어떨지 모르겠다.
혼자서 여행을 할 때는 숙소가 정말 중요하다. 얼마나 좋은 곳을 고르냐에 따라서 여행이 전혀 달라진다. 여기서 좋다는 건 시설이 훌륭하다는 걸 의미하는 게 아니라, 그 숙소가 얼마나 여행자들 사이의 교류의 기회를 마련해주고 있느냐를 뜻한다. 그건 꼭 그런 교류를 위한 시설이 있다는 것만이 아니고 숙소마다 그 특유의 분위기란 게 있어서 계속 전해지는 것 같다. 이곳 칸피라소는 그런 점에 있어서는 어느정도 여행자들 간의 교류가 제법 가능한 곳이었다. 담배를 피우거나 맥주를 한 잔 하려면 거실로 나가야 하는데 거기에 가면 항상 사람들이 몇 명씩 있어서 슬슬 얘기하며 지내기에 좋았다.
밤에는 이곳에서 헬퍼(helper)로 일하는 '스잔'과 '사토시', 그리고 다른 여행자와 같이 술을 마셨다. 처음에는 각자 사온 맥주를 마시다가 조금 불이 붙자 한 아저씨가 아와모리를 가져와서 함께 마구 마셨다. 스잔은 일본인인데도 이름이 이상해서 물어보니 애칭이란다. 원래 이름은 스즈키인데 줄여서 스-상이라 부르다가 사토시가 아예 스잔이라고 지어줬대나. 부부가 같이 온 일행도 있고 다이빙하러 혼자 온 아저씨도 있다. 아까 같이 놀던 유미는 다이빙 로그북을 작성하느라 다이빙샵에 갔다. 첫날인데도 벌써 한참 머무른 것처럼 익숙해졌다. 이래서 올 해에도 다시 온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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