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삼 년째다. 일 년에 한 번 있는 휴가기간 때마다 주섬주섬 혼자 짐을 꾸려 메고 이쪽 섬으로 향하는 이유를 한 마디로 딱 집어 얘기하지는 못하겠다. 처음에는 일본의 탈을 쓰고 있는 따뜻한 열대바다에 대한 호기심이었는데 해마다 다시 가야 하는 이유가 한두 가지씩 늘어난다. 작년에는 첫 여행 때 어설프게 돌아서야 했던 그곳의 바다 속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이유가 추가됐다. 그렇게 가서 8일을 보내며, 짧았던 첫 여행에서 그냥 두고 와야 했던 아쉬움들을 꼼꼼이 주워 담아 가지고 돌아왔다. 어떻게 보면 그렇게 두 번의 여정을 통해 이쪽 지방의 여행을 번듯하게 마무리했다고 해도 좋을만큼 일단락을 지은 셈이다.
하지만 이번에 또 이곳을 향하면서 여행이란 게 그렇게 새로운 경험을 위해 가는 것만은 아니라는 걸 새삼 느낀다. 이미 갔던 여행지로 다시 발길을 돌리게 하는 것은 그리움이다. 그리움이라 하여 오래된 향수 같은 거창한 것은 아니다. 한두 번 머물다 온 곳에 뭐 얼마나 간절한 사연이 있다고 그런 애틋한 그리움이 있겠는가. 다만 기억 속에서 작은 것들을 생각하면서 나도 모르게 생겨나는 끌리게 되는 마음일 뿐이다. 민숙의 복도를 따라 주욱 늘어서 있는, 발 하나 늘어뜨려 방문을 대신한 작은 다다미방 안에서 앉은뱅이 탁자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며 낮에 널어 놓은 셔츠가 보이는 반대편 창가를 그저 하릴없이 보고 있던 기억. 바람을 쐬러 올라간 숙소 옥상에서 혼자 산신을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고 있던 낯선 여행자 옆에 슬그머니 앉아 한참을 그렇게 듣다 수줍게 말을 걸어 이야기를 했던 기억. 밤마다 다들 기어나와 함께 아와모리를 마시며 '샤미센(三味線, 일본의 전통현악기)이 왜 샤미센인줄 알아? 산신(三線, 샤미센의 기원이 된 오키나와 지방의 전통현악기)에 '맛(味)'이 더해져서 그런거야' 같은 싱거운 얘기에 헛웃음을 짓던 기억. 이런 기억들이 그 낯선 그리운 감정의 실체들이고, 그 기억을 어떻게 좀 다시 만날 순 없을까 하는 소박한 기대를 품고 새로울 것 없는 낯익은 그곳을 다시 찾게 되는 것이다.
2008年 8月 3日
짐을 챙겨 집을 나서는 기분이 아주 가볍다. 그건 설레임과 두려움이 없기 때문이다. 떠나기 전 준비도 아주 능숙하게 쓱쓱 해 버렸다. 이건 미리 예약해 두고 저건 가서 알아 봐도 되고 이거 챙겨 가봤자 말썽만 생기니 빼고. 성수기여서 겨우 일본 가는데 마일리지를 45,000마일이나 공제한 점이 옥의 티였지만, 12만엔이나 현금으로 들어 있는 지갑은 두둑하고 이제부터 어디로 가서 무얼 해야 할지 손바닥 보듯 훤히 보이는 여행자의 마음이란 여유로운 법이다. 다 그 나름대로의 맛이 있다. 몇 년 전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 역을 막 나설 때의 기분이 생각난다. 해가 거의 져서 어둑어둑 길 위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려 걸음을 재촉하는 듯 보이던 그런 시각이었다. 그 때의 나는 젊지만 그만큼 풋내기였다. 묵을 곳 하나 정해 놓지 못한 채 곧 밤이 될 낯선 외국의 도시에 혼자 멀뚱이 서 있다 보니 갑자기 가슴이 울렁거리며 겁이 덜컥 났다. 그 막연하고도 똥줄 타는 두려움도 지금 생각해 보면 여행의 맛이다. 그런 맛도 있고 이런 맛도 있는 것이다.
그럼 이번에는 무얼 하러 가지? 그래도 몇 가지 새로운 걸 생각해 둔 게 있다. 나카노우간[仲ノ御神]섬의 바다에 가고 맹그로브가 발을 내린 강을 카약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그리고 만타씨를 만날 것이다. 그 다음엔 익숙하게도 처음 보는 사람들과 밤 늦게까지 아와모리를 마셔야지. 그러고 보면 일 년에 한 번씩 참 비싼 술값을 내고 마시러 가는구나.
2시간을 가서 나하 공항에 도착하니 비가 마구 쏟아진다. 나와 한 비행기를 타고 온 다른 사람들은 마중 나온 렌터카 사무소 차를 타거나 여행사 버스를 타거나 모노레일을 타러 가고 금방 나만 남았다. 비행기를 갈아 타려면 국내선 옆 건물로 가야 하는데 어짜피 시간도 많이 남았고 담배를 피우면서 비가 좀 누그러들기를 기다렸다. 작년에 도착했을 때 나하의 하늘은 정말 파랬는데 이번엔 비다. 이시가키는 다르겠지.
국내선 건물로 가서 일단 점심을 먹으려고 오키나와 소바 가게에 들어가니 자리가 없단다. 저기 여자애들 둘이서 먹는 테이블에 합석하는게 어떠냐 묻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다. 대충 서로 죄송하다는 말 한 마디씩 하고 앉아서 돼지족발이 들어간 데비치소바를 시켰다. 옆의 여자애들은 나온 음식을 앞에 두고 열심히 사진을 찍으며 뭐가 그리 좋은지 얼굴이 환하다.
데비치[テビチ]라는 건 오키나와쪽 말로 돼지 족발을 말하는 건데 어느 나라 족발이건 다 그렇듯 쫄깃하고 맛있다. 하지만 저 묵직한 오키나와 소바의 밀가루 면발은 여전히 술술 잘 넘어가지 않는다. 그나마 이제 3년차라서 좀 적응이 되어 그럭저럭 다 비우고 얼른 일어 났다. 여자애들 둘이 수다 떠는데 옆에서 꾸물꾸물 오래 있기도 뭐하고 후딱 끼니만 때우고 나왔다. 라멘은 반찬이 없어도 잘 먹겠지만 오키나와 소바는 반찬 없이 먹기가 좀 그렇다. 면이 워낙 맨 밀가루 반죽이라서 버겁다.
낙도에 갈 때는 언제나 JTA의 신세를 진다. 옆에 ANA도 있지만 ANA로는 낙도에 가는 맛이 안 나는 거다. 이시가키 공항의 건물도 ANA는 생뚱맞게 깨끗한 신축이라 영 그 기분이 살지 않는다. 사실 처음 2006년에 국내선 비행기를 인터넷에서 살 때, ANA는 비회원의 온라인 구입/카드결제가 잘 되지 않아서 JAL을 이용했던 것 뿐이었는데 이용해 보니 역시 오키나와라면 JTA랄까 하는 기분? 그건 그렇고 JAL이건 ANA이건 일본 국내 마일리지클럽 회원과 국외 마일리지클럽 회원을 따로 관리하는 바람에, 난 분명히 JAL 마일리지클럽 회원번호가 있는데도 JAL 일본 사이트에 로그인이 안 되어 예약을 비회원으로 해야 하는 좀 치사한 문제가 있다. 비회원으로 구입해도 별 문제 없지만 좀 그렇다.
나하 공항의 국내선 청사는 국제선 청사와는 다르게 시설도 좋고 사람들로 붐빈다. 오키나와가 일본 본섬에서 놀러 오기에 만만치 않게 돈이 들어서 오히려 동남아로 가는 것이 쌀텐데도 사람들이 꾸역꾸역 놀러 오는 것 같다. 가만히 다니는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니 쬐끄만 애들이나 좀 젊은 여자아이들이 죄다 이상하게 생긴 신발을 신고 있다. 다들 무슨 일곱난장이들이 신는 것 같은 신발을 신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다니는데 창피하지도 않나 생각했다. 꼭 무슨 강가나 바닷가에서 슬리퍼 없을 때 임시로 삼천원짜리 사서 신는 그런 모양새였는데 그런 걸 이렇게 공항이나 밖에서 버젓이 신고 다니는게 이상했다. 무슨 유행이 불었나 싶었는데, 나중에 집에 돌아와 알고 봤더니 그게 크록스[CROCS]라는 거였다. 이미 한바탕 유행으로 쓸고 지나갔다는 건데 난 수원 촌에 사느라 그런 것도 모르고. 젠장.
23kg짜리 짐을 끌고 다니라 편하진 않다. 일본애들은 다이빙 장비는 여행 출발 전에 집에서 그냥 택배로 이리오모테까지 부쳐 놓고 오는데 그게 참 부럽더라. 여기 여행하면서 일본애들이 부러웠던 건, 그렇게 짐을 택배로 부치는 것과 나아가서는 선물이나 술 같은것도 사서는 바로 택배로 부치는거, 그리고 과일이나 채소 같은 것들을 아무 부담 없이 사 가는 거였다. 이것저것 들고 들어 오고 싶은 것들이 좀 있는데 법규상 못 가지고 들어오거나 너무 무거워서 때려 치워야 한다. 아와모리 댓병도 사가지고 오고 싶은데.
나하에서 이시가키까지는 50분이면 간다. 이시가키 공항에 착륙하는 것은 일본 항공 노선 중에서도 초고난이도에 속한다. 섬에 다 와서 방향을 180도로 완전히 유턴을 하고, 또 활주로에 내리자 마자 혼신의 힘을 다한 급브레이크. 뭐 이제 그러려니 한다.
이시가키는 여전했다. 이 시기에 오면 태풍만 피하면 항상 날씨가 최고로 좋다. 어떤 사람은 더운 지방을 여름에 가는 건 바보짓이라고도 말한다던데 여기는 아니다. 여름에 와야 진정한 이곳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겨울에 싸다고 덥썩 미끼를 물어 오는 사람도 꽤 있는데, 그래봐야 맨날 비만 오고 하늘은 우중충한데다 오슬오슬 춥기까지 하다. 여기는 겨울에 오면 아무 것도 할 게 없다.
조금 과장하자면, 이시가키에서 이리오모테까지 가는 길은 이제 고향 가는 길같다. 뭐 내 기분 자체가 무슨 집에 가는 버스 타는 정도의 긴장감이니, 이제 여기는 이미 그런 곳이 되어 버렸나보다. 활주로를 걸어서 나와 짐을 찾아서 공항 건물을 나서고, 그 앞에서 담배를 한 대 피운 다음 택시를 잡아 타고 '리토 터미날'이라 얘기한다. 항구에 오면 안에이칸코[安栄観光] 사무소에 가서 이리오모테 우에하라항까지 가는 왕복표를 사고, 슬슬 또 담배나 피우며 시간 때우다가 배를 타고 이리오모테로 온다. 배에 앉을 때는 뒷자리에 앉아 TV는 보지 않고. 앞으로도 이곳에 찾아 오는 한 이 공식을 벗어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게 일 년만에 찾아간 이리오모테는 뭐 여전했다. 있던 가게들 그대로 있고 작년에 묵었던 숙소도 여전하고 내가 좋아하는 무인매점도 영업중이고. 올해엔 항구 바로 앞에 있는 우에하라관[うえはら館]에 묵기로 했다. 처음 이리오모테에 왔을 때 우에하라관을 보면서 참 위치도 좋고 괜찮은 곳 같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그래서 이번에는 여기로 한 번 해 본 것이다.
우에하라관에 들어서니 주인 아주머니가 반겨 주고 이런저런 설명을 해 준다. 설명이란 건 뭐 여기 숙소가 다 그렇듯 아침저녁 식사시간이랑 화장실, 샤워실 뭐 그런 것들. 일단 방에 가서 에어컨 바람 좀 쐬다가 슬슬 저녁 먹으러 내려와야지.
방은 6첩 반 다다미방이다. 퀴퀴한 오키나와 특유의 곰팡이 냄새를 맡노라면 이제야 내가 여기 왔구나 하는 실감이 든다. 에어컨을 켠 채로 창문을 활짝 열고 작은 상 앞에 앉아 담배를 피우며 재떨이에 재를 떠는 것이 이 방에서 부릴 수 있는 최고의 사치이다. 난 그걸 하러 왔으니 마음껏 해야지.
여기 우에하라관은 고맙게도 생맥주 기계가 있어서 밥 먹을 때마다 일단 생맥주 한잔 들이키고 시작하곤 했다. 오늘 저녁은 가쓰오 사시미에 파파야 채썰은 것, 닭가슴살 튀김과 샐러드, 지마미 두부, 문어를 잘게 썰어 오이와 미역과 함께 초절임 한 것, 토란과 다른 채소 조림, 모즈쿠와 두부를 넣은 국, 이정도였다. 작년 칸피라소의 저녁식사가 좀 더 푸짐했었는데, 칸피라소가 인력부족으로 저녁식사를 그만두어서 선택의 여지가 없었지만 여기도 괜찮았다. 후식도 한 가지씩 챙겨 주고.
저녁을 먹고 밖에 나가니 이리오모테 야마네코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내일부터는 또 바다에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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